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보호자의 항의, 세 개의 다른 시선

by 행복한ally 2025. 5. 18.

보호자의 항의, 세 개의 다른 시선
보호자의 항의, 세 개의 다른 시선

[장면]

보호자의 항의가 쏟아진 순간


점심시간을 겨우 넘긴 오후 2시였다. 겨우 커피 한 모금 마신 채로 병실로 호출됐다. 거기에 보호자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아직도 약이 안 나왔냐"는 질문에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오전 회진에서 담당교수님의 추가 투약 설명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약은 환자에게 도달되지 못하였다. 분명 담당 레지던트 선생님에게 금일 투약 오더할 예정임을 확인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처방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쏟아지는 항의, 주변의 시선, 서 있던 다리까지 떨렸다.
  


[시선 1 - 나의 감정]

'억울하고 당황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억울했다. 오전에 새로운 투약이 있을 것이라는 교수님의 설명이 있었지만 그 후 언제 투약이 시작될지는 설명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처방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진작에 처방으로 약을 타왔을 것이고 벌써 환자는 약을 먹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의사가 아니다. 투약이 금일 진행되는 것을 확인할 수만 있는 간호사다. 그래서 오전 일찍 나는 이미 투약 진행할 것이라는 담당 레지던트의 말을 듣고 처방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내 잘못이 아님을 설명할 수도 있었고,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말할 수도 있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미 익숙했다. 설명해 봤자 변명으로 들릴까 봐, 그 모든 시간을 감당해야 할까 봐. 그냥 조용히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왜 또 사과했는지, 왜 나는 항상 이 상황에서 침묵하게 되는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죄송하다고 말하는 나 자신이 당시에는 너무 화가 나지만 한편으론 그게 나의 최선의 선택이다. 나의 침묵이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화가 나있는 환자에게 하는 설명은 모두 변명으로 들린다는 것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억울하고 당황했지만 나는 선뜻 내 잘못이 아님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 2 - 보호자의 마음을 상상하다] 

'그 사람도 지쳐 있었겠지'

 

순간적으로는 방어적이었지만,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나니 그 보호자의 표정이 떠올랐다. 매일 병실을 지키며 가족을 돌보는 그 분도 얼마나 지쳐 있었을까. 매일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서있는 환자를 바라보며 불안과 피로, 답답함이 쌓였을 것이다. 새로운 투약을 누구보다 기다렸을 사람이었고 당장에 그 투약으로 환자가 나아지는 건 아니었겠지만 그 약은 그래도 뭔가 달라질 수 있는 희망을 먹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약을, 그런 희망을 누구보다 빨리 먹고 싶었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침 회진 후부터 내내 기다리고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점심이 지나고 약을 먹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다렸던 약이 도착하지 않았다. 거기서 느끼는 감정은 아마 희망이 분노로 바뀌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대상이 나였기에, 나에게 쏟아졌을 뿐.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그래서 더 슬펐다. 서로 힘든 걸 알아도, 감정은 쉽게 충돌하니까. 그 사람도 분명 지쳐 있었을 것이라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격양된 그 보호자의 목소리에 나는 일단 죄송하다고 말했다. 내가 잘못한 건 없었지만 그냥 나는 억울하고 당황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죄송하다고 말하는 나 자신에게 너무나 화가 나는 순간이었지만 그냥 내 입에서 떨어지는 한마디는 '죄송하다'였다.

 


[시선 3 - 간호사로서의 나] 

'나는 결국 이 자리에서 계속 일할 사람'

 

항의가 지나가고, 약을 전달하고, 다른 환자의 호출에 또 응답했다. 이 일은 그렇게 이어진다. 나는 다시 인계를 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고, 다음 처치를 준비하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장면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억울했지만 침묵했고,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은 척했다. 그리고 그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때, 마음 어딘가가 푹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병동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 일을 그만두지 않을 사람이니까.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고, 그 선택에 책임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마음을 누군가 대신 돌봐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 이렇게 글을 쓰며, 내 감정을 스스로 다독인다. 이렇게 나의 루틴으로 내 감정들을 어루만져준다. 내가 겪은 일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마음에 고여 썩지 않게 하려고 한다. 간호사로 살아간다는 건 때로는 감정을 숨기는 일이지만, 그래서 어렵고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는 할 수 없는 그런 일이 간호사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일은 내 감정이 너무나 지친 날이었지만 나는 감정을 잃지 않는 간호사로 남고 싶다. 오늘도 내 자리를 지켜낸 나를, 내가 가장 먼저 인정해주고 싶다. '오늘도 수고했어, 잘했어' 그리고, 그 말을 내일 아침에도 잊지 않으려 한다.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도, 똑같이 따뜻하게 말해줄 수 있도록. “괜찮아, 너는 잘하고 있어.” 그 다짐이, 내가 다시 병동을 향해 발을 딛게 만드는 진짜 힘이니까.



개인정보 처리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