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를 돌보며, 나는 나를 잊었다
어느새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내 하루의 기본값이 되었다. 당연히 이게 나의 업이니 그것이 당연하다. 환자의 호흡, 활력, 통증, 상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꼼꼼히 체크하면서, 정작 나는 나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오늘 아침은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떠올려보지 않는다. 누군가를 돌보는 나의 일에 몰두하게 되면 나를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하게 된다. 누군가의 상태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나의 컨디션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약 시간을 기억하면서도, 내 생리통엔 진통제 한 알 챙기지 못한 날들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점점 잊혀가는, 잊을 수밖에 없는 나의 삶들을 다시 뒤돌아봐야 한다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오늘도 감사했어요." 환자의 보호자가 건넨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 깊은 곳은 어딘가 텅 빈 기분이었다. 이런 말 한마디에 내가 또 하루를 버텼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지금도 나를 갉아먹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해줄 때마다 조금씩 내 안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 간호사라는 길로 들어서면서 돌봄은 분명 내가 선택한 일이었지만, 그와 함께 따라온 ‘나를 잊는 일’은 결코 바라지 않았던 부작용이었다. 지치고도 지친 하루의 끝자락에서 가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오늘, 나는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을까?" 그 질문에 침묵이 흐를 때, 나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를 알아차린다. 누군가를 돌보며 나를 잊은 나를 발견한다.
🎗 “간호사니까 괜찮겠지”는 누구의 말일까
언제부턴가, 주변 사람들은 물론 나 자신조차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간호사니까 버틸 수 있잖아." "이 일은 원래 힘든 거니까." "이젠 익숙해졌겠지." 하지만 그 말들은 실상 나를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겪는 고통을 당연시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이런말들에 발끈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내가 점점 감정 없는 사람이 되어가듯이 이러한 말들에 감정이 없어졌다. 사람들은 간호사를 강인하고 헌신적인 존재로 여긴다. 물론 그건 간호사들이 꾸준히 노력해 만들어낸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매일 새롭게 적응하고, 매일 새롭게 다치고, 그리고 매일 새롭게 회복해야만 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간호사도 아프다. 울고 싶고, 도망치고 싶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날이 있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환자 옆에서 웃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환자에게는 ‘누군가의 마지막 희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무게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무겁고, 그 무게는 매일 내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건강을 지키는 일을 하면서도, 내 감정은 꾹 눌러 담아야 한다. "괜찮아"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괜찮지 않은 날이 더 많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간호사니까 괜찮을 거야’라는 말은 누구도 아닌 내가 나에게 던진 가장 잔인한 위로였다는 걸 깨닫는다. 그날 이후, 나는 그 말을 더는 나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
🌱 나를 돌보는 연습, 그게 내가 오래 일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작은 실천을 시작했다. 무리한 계획도 거창한 다짐도 아닌, 내가 매일 해볼 수 있는 소소한 변화들. 그것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퇴근 후엔 핸드폰을 내려놓고 딱 10분만 창밖을 본다. 불빛이 깜빡이는 도시를 바라보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커피 대신 따뜻한 허브티를 마시고, 일기장 한편에 감정 한 줄을 남긴다. "오늘은 조금 힘들었다." "오늘은 참았다." "오늘은 별일 없었다." 그 짧은 한 줄이 쌓일수록 나는 내 삶의 결을 조금씩 되찾는 기분이다. 정말 간단하고 별거 아닌 일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내 마음이 그 간단한 일조차 허락해주지 않아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 짧은 한 줄을 우연히 적어보고 나는 알아차렸다. 내 마음을, 감정을 알아주는 일은 너무 간단한 일이었다는 것을.
나는 간호사다. 누군가의 삶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내 삶도, 내 마음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진짜 간호사의 지속 가능성을 만드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시작은 거창하지 않다. 아주 작고 사소한 자기 돌봄에서 출발한다. 오늘 하루 힘들었더라도, 내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 "나는 지금 조금 지쳐 있어"라고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게 내일도 다시 유니폼을 입을 수 있는 힘이 된다. 나는 이제 나를 잊지 않으려는 이 작고 조용한 시도가 결국 내가 간호사로 오래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 될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