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5, “간호사님 맞죠?”
처음으로 “간호사 선생님”이라는 말을 들었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니 정말 잊을 수 없다.
정식으로 첫 출근한 날, 이름표를 단 유니폼을 입고 병동 복도를 걸었을 때,
나는 마치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처럼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날 아침, 거울 앞에서 유니폼 매무새를 수없이 고치고,
인계장의 글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떨리는 손으로 스테이션에 섰다.
불안함, 떨림, 그리고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 뒤엉켰다.
처음 인사를 건넨 환자분은 할머니였다.
주사 바늘이 무서워 눈을 질끈 감고 계셨고, 나는 옆에서 조심스레 손을 잡아드렸다.
그 순간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간호사 선생님, 손이 따뜻하네.” 나는 놀랐다.
‘간호사’라는 호칭이 내게 너무 크고 낯설게 들렸기 때문이다.
실습생 땐 듣지 못했던,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나를 간호사로 인정해주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동시에 두려웠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데, 이 말이 나에게 어울릴까?
스스로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꼈던 나는, 그 짧은 호칭 하나에 기쁨과 부담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지만 그날 하루가 끝났을 땐 분명했다.
나는 이제 누군가에게 간호사였고, 그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현실이 되었다.
‘간호사’라는 이름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묵직했고, 그래서 더 지키고 싶은 이름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간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몇년을 이 시작을 위해 준비했었는데, 그 길이 정말 시작된 것이다.
🫧 16:40, 환자의 손끝에 닿다
처음에는 “간호사 선생님”이라는 말이 그저 호칭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난 뒤의 일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 호칭은 단지 나를 부르는 말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계속 상기시키는 이름이 되었다.
그게 가장 나를 채찍질 했다.
실수하면 안 되고, 표정 하나하나에도 신중해야 하며, 말투에도 온기를 담아야 했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에 환자가 불안해할 수도 있고, 보호자가 나를 신뢰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는 걸 곧 알게 됐다.
특히 내게 처음으로 “이거 괜찮을까요?”라고 물었던 보호자의 눈빛은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지만, 사실 확신이 없어 밤늦게까지 교과서를 다시 뒤적였다.
그 이후로 나는 매일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나는 이 이름값을 하고 있는 걸까?”
간호사라는 단어는 단순히 면허증 한 장으로 얻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매 순간 책임과 따뜻함, 그리고 침착함을 동시에 요구하는 태도였다.
누군가의 생명을 돌보는 일이기에 가벼울 수 없었고, 익숙해질 수도 없었다.
그 무게가 버거운 날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그 무게 때문에 내가 더 단단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무게를 덜어내기보다는,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간호사라는 나의 직업에 나는 몸담아졌다.
모든 간호사들이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이 모든 마음을 다 가슴 한켠에 모아두고 사는 직업, 그게 내가 선택한 간호사라는 길이다.
‘간호사’는 이제 직업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내 모습이 되었다.
🌙 22:15, 이름 대신 불리는 그 단어
퇴근을 준비하며 복도를 지나던 늦은 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익숙한 호칭.
“간호사님!” 내 이름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그 단어가 유난히 뭉클하게 들렸다.
병원에서 나는 종종 이름을 잃는다.
호출음, 알람, 지시, 긴박한 상황들 속에서 나는 누구였는지를 잠시 잊고 산다.
하지만 그 짧은 호명 하나가 다시금 나를 이 자리로 데려온다.
간호사라는 이름. 그것은 단순한 직함을 넘어선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믿고 기대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물론 이 이름은 나를 지치게도 한다.
간혹 책임의 무게에 눌리고, 실수 하나에 잠 못 드는 밤도 있다.
하지만 그 무게 덕분에 나는 더 단단해졌다.
이름 대신 ‘간호사님’이라 불리는 그 순간, 나는 다시 나를 다잡는다.
오늘 하루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응급상황도, 실수도, 따뜻한 말 한 마디도 있었다.
그 모든 감정이 뒤섞인 하루의 끝에서, 누군가의 입에서 들리는 "간호사님"이라는 말은
마치 나에게만 들리는 응원처럼 다가왔다.
나는 아직 완전하지 않고, 매일 흔들리지만, 그런 나를 버티게 하는 건 바로 이 이름이다.
자격증으로 얻은 단어가 아니라, 매 순간 행동과 태도로 증명해내야 하는 이름.
나는 오늘도 그 이름 위에 서 있고, 그 무게를 감당하며 내일을 준비한다.
간호사라는 이름은 내가 매일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