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나도 처음엔 참지 않았다
간호사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참는 사람이 아니었다. 불합리한 일에는 억울했고, 무례한 말에는 속상했다. 환자가 언성을 높이면 깜짝 놀랐고, 선배의 말투가 거칠면 눈물이 고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 방식은 솔직함이었고, 표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반응은 병동에서 흔쾌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감정적인 사람”,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간호사”라는 평가가 따라붙었다. 주변의 시선이 변하면서 나도 조금씩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화가 나 있었고, 인사하듯 말하지만 마음은 울고 있었다. 점점 나는 감정을 접는 법을 익혔다. 말하지 않으면 일이 더 편해졌고, 웃는 얼굴이 더 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사회성이었고, 그것이 프로페셔널이라고 여겨졌다.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게 ‘참는 간호사’가 되어갔다. 감정을 꾹꾹 눌러가며 일하는 모습이 능력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은 점점 지워져 갔다. 감정을 억누르고, 상처를 그대로 쌓아두며 일하는 일이 무뎌진 채로 지속됐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느끼는지조차 점점 모르게 되었다. 그렇게 감정 없는 간호사가 되어갔다. 그리고 그건 분명 내가 원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간호사의 일을 해보면 안다. 어느새 모든 것에 참는 내가 되어 있다는 걸. 그래서 이 일이 힘든 것이다. 내 감정을 억누르며 다치는 줄도 모르고 일만 하게 되는 것. 그게 간호사의 현실이다.
[고백] 그런데 그 참음이 나를 병들게 했다
처음엔 조용히 넘어가던 일이었지만, 점점 감정은 쌓여갔다. 환자의 불평, 보호자의 의심, 동료의 무심한 말투. 그 모든 걸 하루에도 몇 번씩 겪으면서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웃으며 대답하고, 뒤돌아서는 순간 속으로 삼켰다. 그렇게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은 결국 어느 날 터졌다. 평범한 오후, 동료의 가벼운 농담 한 마디에 눈물이 쏟아졌다. 나도 놀랐다. 왜 그 말을 못 견뎠는지.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지금까지 참았던 건 사실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걸. "나는 괜찮지 않았다"는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후로 나는 무조건 참는 게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다. 감정은 누르고 억누를수록 곪는다. 회복은 피로보다 감정에서 늦게 온다. 그러니 나를 보호하는 방식은 참음이 아니라, 표현이었다. 아주 작게라도 나의 감정을 꺼내는 일, 그게 나를 무너지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병들고 있던 내 마음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조금만 일찍 내 감정을 돌봤더라면 어땠을까. 그 아쉬움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감정이 터진 날 이후로 나는 나를 조금 더 살펴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진짜 괜찮은 걸까?' 하고. 참는 것이 어른스러움이 아니라는 걸, 참고 나서 무너지는 건 회복이 아니라 붕괴라는 걸,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건 착각이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랐고, 결국 나조차도 내 마음을 외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참기 전에 내 마음을 먼저 살펴본다.
[선언] 이제는 나도 나를 위하는 중이다
지금 나는 여전히 참고 있다. 하지만 예전의 참음과는 다르다. 예전엔 이유 없는 인내였다면, 지금은 ‘나를 위한 판단’이다. 이제는 참기 전에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건 참아야 할까, 아니면 표현해야 할까?” 그렇게 묻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다. 내 감정의 주인이 된다. 일하며 잠시 묻어두었던 감정을 이제는 틈틈이 꺼내어 본다. 퇴근 후, 하루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적어보거나, 소중했던 순간을 되짚어본다. 감정이 격해진 날에는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거나, 혼자 산책을 하며 풀어낸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작은 보상을 준다. 좋아하는 디저트, 향기 좋은 샴푸,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조용한 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쌓여 나를 회복시킨다. 참는 삶이 아니라, 나를 아끼는 삶으로 가는 중이다. 간호사는 늘 남을 돌보지만, 나는 이제 내가 내 감정의 간호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마음 하나가 내 하루를 바꾸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도 이 일을 하고 있고, 여전히 고단하지만, 이제는 나를 아프게 하면서 일하지 않는다. 그게 내가 진짜 간호사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임을 이제는 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혹시 마음의 생채기를 외면한 채 버티고 있다면, 제발 꼭 한 번쯤 들여다보길 바란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