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나는 늘 ‘미안합니다’라고 말했을까.
간호사로 일하며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죄송합니다”였다.
약이 늦어도, 수액이 안 맞아도, 보호자가 예민해도,
내가 실수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먼저 사과했다.
환자가 버럭 소리를 질러도 “죄송해요”라고 반사적으로 대답했고,
의사의 지시가 누락되어도 “제가 다시 확인하겠습니다”라고 책임을 덮었다.
나는 원래 이렇게 죄송하다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결단코 아니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쉽게 잘 하지 못해 오히려 주변에 미안할 정도였다.
그런 내가 어느 날은 심지어 보호자가 침대에 음료를 쏟아놓고도 내게 화를 냈는데,
나는 또 사과했다. 그때 들었던 질문이 내 머릿속을 맴돈다.
“왜요? 그게 왜 간호사 잘못이에요?”
맞다. 나도 몰랐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쉽게 미안하다고 말했을까?
누가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은 없다.
그건 병동이라는 공간에 스며든 공기 같은 거였다.
부당한 상황에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사람,
눈치껏 상황을 정리하는 사람. ‘잘하는 간호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참았다. 그리고 사과했다.
그게 이 일에서 살아남는 방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렇게 믿게 되었을까?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았다.
그건 내가 하는 일의 성격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내가 해야하는 일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끝나야 나는 다른 일을 끝낼 수 있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어쨌든 나를 미안하다고 하는 말로 모든 일을 종결짓게 했다.
💬 사과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였다
나는 처음엔 정말 죄송해서 사과했다.
어떤 실수는 분명 내 책임이었고, 그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그 사과는 감정이 아닌 구조가 되었다.
감정이 없는 말, 상황을 정리하기 위한 기능성 언어.
‘죄송합니다’는 상황을 빨리 끝내고, 상대를 진정시키고, 내 마음을 눌러두기 위한 스위치였다.
그렇게 나는 습관처럼 고개를 숙였고, 그러면서 점점 ‘나의 억울함’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무시당했다.
내가 내 감정을 설명하지 않으니, 아무도 몰랐다.
나는 점점 더 조용해졌고, 말 대신 웃는 연습을 했다.
웃으면서 울고 있는 날도 많았다.
어느 날 퇴근길, 거울 속 내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오늘 정말 죄송했을까? 아니면 그냥 억울했던 걸까?”
그때 처음으로 내 감정의 진짜 이름을 붙였다. 나는 억울했다.
하지만 그 억울함의 억울함을 풀어줄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못할 것을 알기에,
나는 그냥 미안했다.
그리고 내 자신이 한없이 가여웠다.
그러면서 이렇게 계속 내 감정에 다른 이름을 붙이기 싫어졌다.
내가 좀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할 일을 조금 더 미루더라도,
감정이 없는 죄송합니다는 더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이렇게 다른 이유로 내 감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나에게 솔직하지 못한 간호사가 되어버린다면,
이 일을 오래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 이제는 내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중이다
사과를 멈춘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전과 다르다.
미안하지 않은 일엔 사과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 마음에게 미안한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설명한다. “그건 제 실수는 아니에요. 하지만 다시 확인해 드릴게요.”
그 말을 꺼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나는 늘 ‘착한 간호사’로 살아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 내 일을 좀 더 빨리 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내 감정을 무시하면, 그 누구도 대신 알아주지 않는다는 걸.
나에게 가장 소중한 마음을 정말 소중히 대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염없이 내 감정을 들여다본다.
사소해 보여도, 억울하고 속상한 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퇴근 후, 조용한 밤에 나에게 묻는다.
“오늘 너는 정말 미안했니? 아니면, 그냥 슬펐니?”
그 질문에 솔직해질 수 있다면, 나는 내일도 조금은 더 건강하게 일할 수 있다.
내가 나에게 가장 솔직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게 간호사로 오래 살아남는 방식 중 하나다.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려서 후회가 된다.
지금도 이 늦은 새벽에 미안하지 않지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간호사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의 감정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이야기 하는건 어떠냐고